소심은 나의 힘 : 파비우스 (16)

[뉴스케이프 공희준 기자]

로마는 두산 야구단 같이 뛰어난 맹장과 유능한 병사들을 화수분처럼 배출했다. (사진 : 베어스 누리집)

“파비우스가 승승장구하는 동안 한니발은 어디서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칸나에에서의 대승을 이끌어낸 한니발의 명성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 독자들이라면 파비우스의 반격이 본격화된 부분에서 이런 물음을 짜증스럽게 던질 수밖에 없으리라.

한니발은 이때 우두커니 손가락만 빨고 있었다. 그것도 타렌툼에서 불과 5밀레밖에 떨어지지 않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 1밀레는 고대 로마 시대에 거리를 측정하는 단위로써 성인 남자 기준으로 1천 보 정도를 걸으면 도달할 수 있는 거리이니, 파비우스와 한니발은 서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주둔하고 있었던 셈이다.

타렌툼이 적군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급보를 접한 한니발은 로마군 안에 자기처럼 지모가 뛰어난 자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며 꼭 남의 일 말하듯이 태연하다 못해 아예 유체이탈 화법을 방불하게 하는 심드렁한 반응을 보였다.

그런데 그의 속마음도 그랬을까? 한니발의 본심은 친구들에게 한 고백에서 뚜렷이 드러난다. 그는 로마와 카르타고 사이의 전력 차이가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격차로 벌어졌음을 실토했다. 포에니 전쟁은 본질적으로 페넌트 레이스 성격을 띠었다. 단기간의 총력적으로 펼쳐지는 포스트 시즌이 아니었다.

저변 넓고 확실한 육성 시스템을 갖춘 로마 구단의 화수분 야구를 몇몇 이름값 높은 스타급 선수들의 활약에만 거의 전적으로 의존하는 카르타고 구단의 소수정예 엘리트 야구가 당해내기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더더욱 어려워졌다. 타렌툼을 둘러싼 승부처에서 카르타고는 마운드에 등판시킬 투수가 더 이상 불펜에 남아 있지 않았다. 감독 겸 선수인 한니발의 한숨과 고민이 바로 이 지점에 가로놓여 있었다.

더군다나 카르타고가 타렌툼을 완전히 장악했던 것도 아니었다. 마르쿠스 리비우스라는 이름의 로마군 장수가 파비우스가 진입하기 전까지 도시의 일부분을 여전히 사수해오고 있었다. 타렌툼이 로마군 손아귀 안에 도로 돌아온 이후 리비우스는 자신이 이번 시리즈의 최우수 선수임을 주장했다. 그러자 파비우스는 능글맞은 미소를 얼굴 가득히 지으며 비웃음 섞인 맞장구를 쳤다.

“자네 말이 맞네. 자네가 애당초 이 도시를 한니발에게 빼앗겨주지 않았다면 내기 이 도시를 어떻게 되찾을 수 있었겠나?”

로마인들은 카밀루스에 못잖은 구국의 영웅인 파비우스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별짓을 다했다. 파비우스의 아들인 또 다른 파비우스를 집정관에 앉힌 일도 그 일환이었다.

하루는 이제는 민간인 신분으로 돌아간 아버지 파비우스가 말을 타고 길을 가다가 집정관이 된 아들 파비우스 일행과 마주쳤다. 젊은 집정관은 수행원을 보내 아버지에게 말에서 내려 집정관을 향해 정중한 예를 표하도록 했다. 이 광경을 지켜본 시민들은 아들을 버르장머리 없는 불효자라고 떠들썩하게 욕했다.

그렇지만 아버지 파비우스만은 “부모와 자식 간의 사적인 관계보다 나라의 체통과 국익을 더 우선시하는 네가 정말 자랑스럽다”라고 기뻐하면서 아들을 따뜻하게 껴안았다. 가히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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